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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13
201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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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그 어디에... 맨 프럼 어스

영화 ‘맨 프럼 어스(2007)’ 포스터 – 네이버 출처
글. 이동기(대회협력사업화실)

 더위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폭염을 견디기 위해 해마다 여름 시즌이면 영화계는 서늘한 기운을 안겨주는 공포 영화를 선보이곤 한다. 국내에서는 허정 감독이 ‘장산범(2017)’을, 해외에선 실화에 기반을 둔 애나벨 스토리가 인형의 주인을 알려주기 위해 다시 한 번 ‘애나벨 : 인형의 주인(2017)’으로 관객들을 찾는다. 하지만 공포 기운만으로 이러한 더위가 쉽게 물러갈까. 필자는 오늘 관객들의 머릿속 치열한 두뇌 싸움을 통해 무더위를 극복하는 방법을 추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영화나 소설 등 가상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주제들은 다소 평범하고 제한된 내용만을 다뤄왔다. 이를테면 사랑, 죽음, 재난, 사고, 범죄, 탈출, 공포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된 이야기들도 달리 보면 선(善)과 악(惡)으로 대변되는 단순한 구도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들 또한 단순화를 시켜보면 대부분 이러한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을까. 갈등을 유발하는 사람이 항상 존재한다거나, 주인공은 반드시 선(善)을 대표한다든가,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든가, 마무리는 대개 해피엔딩이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의 공식들은 아직 영화의 주제가 많은 부분 한정된 시각의 틀에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현실이 아닌 창작의 스토리에서 완전히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앞에서 열거한 분류와는 다른 특별히 생소한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는 영화 한 편을 얘기했으면 한다. 개봉 당시 종교적인 문제로 많은 이들의 논란에 올랐던 영화, 리처드 쉔크만 감독의 ‘맨 프럼 어스(2007)’이다.

영화 ‘맨 프럼 어스(200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영화는 꽤 단순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등장인물로 한정된 이야기를 진행한다. 제작비가 별로 들지 않았을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배우들의 대화와 갈등을 통해 철저하게 관객들과 소통하려 애쓴다. 너무나 터무니없고 억지스러운 논제를 던지고 관객들의 반응과 흐름을 파악하려 하지만 오히려 배우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해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려는 모습 또한 보인다. 지금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자.

 주인공 존 올드맨(데이빗 리 스미스 분)은 10년간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종신교수직까지 제안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갑자기 이사를 결심한다. 이삿짐을 옮기는 날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 교수들이 존과 작별인사를 하러 존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존이 갑자기 떠나려는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물어본다. 동료들의 계속된 추궁에 결국 존은 사실 자신이 14,000년 전부터 살아온 사람이고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기 전에 10년 주기로 한 번씩 이사를 다니며 신분을 바꿔 지내왔다고 고백한다. 존의 허무맹랑한 고백이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한 동료들은 그의 거짓을 밝히기 위해 각자의 전문지식을 동원해 하나씩 질문을 하며 이를 검증하게 되는데 이에 존이 각각의 질문에 논리정연하게 답변을 하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그의 주장에 설득력을 싣게 된다.

영화 ‘맨 프럼 어스(200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14,000년 동안 살아온 인간이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지금까지의 얘기를 듣고 혹시 이 영화에 대해 호기심이 발생한 이가 있다면 영화를 직접 찾아보기를 추천한다. 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수많은 리뷰와 비평을 찾아봐도 좋겠다.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은 다양성을 함축하니까. 내 생각이 맞고 네 생각은 틀렸다는 이분법적인 시각은 적어도 영화 해석에서 만큼은 통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이 모든 관객들의 반응 또한 감독의 연출 의도 안에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영화는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위에서 한 남자가 짐을 싸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듯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 장면은 영화가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의미 있는 장면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영화 속 존의 고백은 주인공 존이 동료 교수들의 추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듯 해보이지만 사실 존의 고백은 계획된 의도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 고흐 작품을 트럭의 옆에 자연스럽게 잘 보이는 위치에 놔둔 것이라든지, 표정과 말투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라든지, 그리고 너무나 침착하게 조니워커 그린을 꺼내 동료들을 대접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맨 프럼 어스(200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동료들은 각자 자기 분야에 있어 전문가이기 때문에 결코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학문적 지식을 근거로 존의 갑작스런 고백을 대한다. 생물학자인 해리(존 빌링슬리 분)는 가볍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이야기를 종용하는 역할을 맡았다. 고고학자인 댄(토니 토드 분)은 시종일관 침착한 목소리로 논리적인 질문을 펼친다. 인류학자인 아트(윌리엄 캇 분)는 존의 이야기를 의심하며 내과의사인 그루버(리차드 리엘 분)를 장소에 불러들이는 일을 한다. 신학자인 이디스(엘렌 크로포드 분)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종교적인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서 극도의 흥분을 하게 된다. 이후에 끼어든 그루버는 의학적인 지식을 동원해 존의 거짓을 밝히려 노력하지만 불과 얼마 전에 죽은 아내로 인한 상처로 심리적인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영화는 이처럼 모든 전문가들이 각자의 지식과 상황을 동원해 과학적인 검증을 시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주인공 존은 이들의 지식을 속으로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의 질문에 하나씩 침착하게 답변을 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피해간다. 물론 관객들의 눈초리도 포함됨은 당연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관객들이라면, 우리라면 과연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본인이 14,000년 전부터 살아온 유인원이라고 고백을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와 같이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채 침착하게 검증하지는 못할 것 같고 아마도 열이면 열 모두 미친 놈 취급을 하며 돌아서지 않을까 싶다. 사실 우리는 주위에 들려오는 불가사의한 일들, 이를 테면 미확인 비행물체(UFO), 외계인, 귀신 혹은 유령 등의 존재들에 대해 분명 수많은 목격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됐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는 일이 많지 않은가.

영화 ‘맨 프럼 어스(200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영화는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진실이 우리 앞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리처드 쉔크만 감독은 이를 종교적인 접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화는 주인공 존이 본의 아니게 예수 그리스도가 됐음을 고백한 장면이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두고 종교적인 해석과 비판을 시행했지만 필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의 종교적인 대화는 크게 주목할 부분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영화의 핵심 방향은 신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동안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졌을 때 그걸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게 ‘신’이라는 한 글자로 강조됐을 뿐.

 이후 이들의 대화는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지구의 탄생까지 이르렀던 내용은 성경(성서) 자체를 신화로 만들어 버린다. 역사를 건너오며 사람들의 덧칠이 심해진 신화 말이다. 신학자인 이디스가 유독 이 문제에 민감해 이를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강하게 부정하는데 결국 이로 인해 신의 존재를 신뢰하는 이와 부정하는 이들의 대립구도가 형성된다. 이디스의 옆에 앉아 있던 해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으로 옮겨 앉는 장면은 자연스러운 연출일 것이다. 15~17C 유럽에서는 다수의 목소리라는 명목만으로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고 마녀사냥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소수가 진실일지라도 다수의 거짓에 묻히기도 했으며 이에 반대를 할 경우 거센 저항과 억압을 받았다.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과연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겉으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지만 잘못된 거짓만을 쫓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영화 ‘맨 프럼 어스(200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영화 속에서 주인공 존은 성경 속에 비친 예수의 말을 인용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이처럼 그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존은 스스로 동료 교수들에게 자신의 말을 믿을 건지 믿지 않을 건지에 대한 선택권을 드리는 것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영화는 배우들의 대화와 반응을 통해 관객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후반부에 다다르며 존과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점차 한 곳으로 모은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듯 했지만 사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건 바로 지금까지 얘기했던 존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대답하라는 강요였다. 그들은 존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하면서 이를 통해 사실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음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진 그들의 대화는 존의 치밀하고도 거의 완벽했던 거짓 연극이었음을 확인하면서 마무리를 짓게 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관객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뭔가 찝찝한 마무리를 석연치 않아 했을 수 있다. 어쨌든 사람들이 작별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마지막 씬(scene)에서 유독 창문으로 비친 그루버 교수의 행동이 어색하게 느껴진 건 기막힌 반전을 암시하는 감독의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그루버 교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다소 밋밋했던 이 영화의 흐름에 강한 임팩트를 줬다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반전이 이 영화의 흐름을 저해하는 요소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대화의 흐름에 조금은 부적절한 연출이 아니었는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영화 ‘맨 프럼 어스(200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존의 제자 샌디(애니카 피터슨 분)의 행동은 이 영화의 여운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존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심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인물로서 동시에 존에게 사랑을 고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자네를 책임질 수 없다는 존의 말에 “얼마나 길면 영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는 샌디의 말은 존이 이 영화에 던졌던 팽팽했던 진실과 거짓의 구도를 흐트러뜨리는 말이 아니었을까. 앞서의 조니워커 그린 또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14,000년을 살아오면서 비슷하지만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던 존의 이름이 한 때는 ‘조니’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조니는 오랜 시간 동안 녹색의 푸르른 초원을 맨발로 거닐며 자연을 느꼈다고 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올려 보면 영화의 마무리에 나타난 반전의 의미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Johnnie Walker Gr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