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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15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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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파괴의 共存을 논한다면... 아키라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 포스터 – 네이버 출처
글. 이동기(대회협력사업화실)

 유소년 시절, 월간 ‘우뢰매’라는 소년소녀들을 위한 잡지가 있었다. 당시 비슷한 종류의 소년중앙, 소년경향, 새소년 등과는 달리 아이들의 눈길과 관심을 끌만한 애니메이션만을 중심으로 내용을 채워 제법 높은 인기를 얻었던 걸로 기억한다. 삼십년도 넘은 케케묵은 이야기를 지금 꺼낸 이유는 필자가 좋아했던 그 잡지 속에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화풍과 강렬한 색채,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어린 필자의 마음속에 인상 깊은 기억을 남겼던 그 추억을 이 자리에서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최근 재개봉을 하며 언론과 매니아들의 열정을 다시 한 번 뜨겁게 달군 재패니메이션의 역사이자 대표작, ‘아키라(1988)’를 소개한다.

월간 ‘우뢰매’ 잡지 표지 – 우뢰매닷컴 출처(www.wooroemae.com)

 그 동안 얘기했던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는 측면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좀 더 다뤄볼 수도 있겠지만 복잡하고 전문적인 접근보다는 색채와 표현 방식, 그리고 감상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이는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내용 자체만으로 이미 복잡하고 전문적인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의 메시지, 영상의 표현 방식, 화면에 내재되어 있는 시각적 요소 등에 대한 관객과 평론가들의 평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참으로 후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어릴 적 접했던 이 작품에 대한 기대에 비해 조금은 실망스럽고 필자가 받은 번잡하고 어지러운 느낌을 못내 지울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탄생시킨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관, 가치관, 세계관 등을 떠나 애니메이션 그 자체로서의 메시지만을 받아들이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과 표현력을 담고 있어서이다. 그래서일까, 더더욱 이 작품이 가지는 무게를 비교적 쉽고 서툴게 얘기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키라(1988)는 도시의 붕괴 후 새롭게 재건된 2019년의 네오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오토바이 폭주를 즐기며 하루를 보내던 주인공 카네다(이와타 미츠오 분)와 친구 테츠오(사사키 노조무 분)가 어느 날 같은 폭주족 크라운파와 대결을 벌이던 중 테츠오가 정부 군에게 끌려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카네다는 테츠오를 구하기 위해 반정부군의 일원인 케이(코야마 마미 분)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 사이 테츠오는 군의 연구 실험체가 되어 초능력에 각성하게 된다. 이로 인해 테츠오는 실험에 따른 고통과 초능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군의 연구소에서 도망치게 되는데 이 때 본인의 능력을 마구 휘두르며 사실상 아무도 제어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다다른다. 정부 군의 연구소가 만든 또 다른 초능력 실험체인 25호(키요코, 이토 후쿠에 분), 26호(타카시, 나카무라 다츠히코 분), 27호(마사루, 카미후지 카즈히로 분)는 폭주하기 시작한 테츠오를 제어하기 위해 그 동안 봉인되어 온 절대에너지 아키라를 깨우게 되고 아키라와 테츠오 간의 힘겨루기 속에서 네오도쿄는 또 다른 붕괴와 새로운 시작의 국면에 접하게 된다.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아키라(1988)의 시작과 끝은 도시의 붕괴이다. 기존의 도쿄가 붕괴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첫 화면은 이후 세워진 네오도쿄 또한 아키라의 봉인된 힘이 풀리면서 또 다시 붕괴를 맞이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원작인 만화의 내용에 충실해 지저분해진 또는 타락한 도시를 청소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감독 나름대로 부여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원작과 다른 새로운 결말을 제시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있다. 이미 타락한 도시를 한번 붕괴시키고 새로운 네오도쿄를 건설했음에도 이 역시 별다른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자 또 다시 이를 붕괴시키는 선택은 너무나 단순하고 비관적인 처리 방식이라는 생각에서다. 타락의 길을 향한 도시를 싹 밀어버리고 새롭게 도시를 정비했지만 이 또한 여전히 타락의 길을 향하고 있다면 또 다시 이를 정리하는 행위 자체가 도시의 부흥 이유도 의미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관점에서 이를 바라보자면 결말의 독창적인 해석은 회생 방식의 잘못된 선택 혹은 인간의 타락성에 대한 회고 정도로 결론지어도 좋을 것이다. 결국 원작자이자 감독인 오토모 가츠히로는 관객들에게 다소 페시미즘(pessimism)에 가까운 세계관 혹은 디스토피아(distopia)적인 미래를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창조적 미래를 위해 엄청난 위기와 고통이 수반되고 그 체제의 파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사실 지난 9월에 소개했던 영화 왓치맨(2009) 또한 오지맨디아스(매튜 구드 분)의 주장과 객기가 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 없는 이유는 체제의 파괴를 이루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음에도 아키라(1988)의 화면 어느 곳에서도 달라진 희망적인 청사진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시간 동안 보여준 화면은 하나도 빠짐없이 우울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모습뿐이다. 혹자는 인류 재생론에 기반을 둔 철학적 담론 제시에 무게를 두기도 하지만 오히려 1960년대 일본의 산업 성장기를 스크린에 반영시킨 감독의 의도로 설명하는 게 어쩌면 좀 더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싶다.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관객들은 ‘아키라’의 정체와 모습에 대한 기대가 크다. 시종일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올림픽 경기장 아래에 갇혀 있었던 아키라는 급기야 조각난 몸으로 관객들을 첫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영상의 마지막 장면까지 아키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테츠오를 기반으로 거대화를 이루며 서서히 그를 흡수하는 장면은 90~200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현대 관객들에게는 다소 식상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2017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되짚어보는 1988년 작으로서의 시간의 역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인간과 인간을 흡수해 거대화를 이루거나 하는 상상력의 극치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작품들 또는 아라키 테츠로 감독의 진격의 거인(2013), 그리고 필자가 이 자리를 빌려 리뷰를 한 바 있는 아이 엠 어 히어로(2015)의 원작 만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제작 방식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보자. 아키라(1988)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보면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셀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어릴 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셀룰로오스 아세테이트로 만들어진 투명판 위에 그림을 그려 이를 덧대어 애니메이션 효과를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각각의 투명판 위에 연속적인 그림을 그린 후 이를 카메라로 촬영해 재생하는 형식인데 정지 화면은 그대로 놔두고 움직이는 부분만 다시 그리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제작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아키라(1988)가 기술적인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현대의 디지털 기술력과 비교해 당시 상대적으로 열악한 제작 환경에 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비 약 2~3배 분량인 무려 15만장 이상의 셀 화를 사용해 제작되었다는 것과 애니메이션계에서 최대치라고 불리는 327가지의 색상이 활용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기술적인 시도가 이 애니메이션을 재패니메이션의 역사이자 대표작으로 추켜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그림의 화풍과 필체는 기존의 둥글둥글한 붓 터치가 아닌 조금은 날카롭고 직선적인 흐름이 많다. 이는 1985년에 설립되어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모노노케 히메(1997), 벼랑위의 포뇨(2008) 등으로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작품과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키라(1988)는 다카하타 이사오, 하야카와 케이지와 함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대표작인 미래소년 코난(1978)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익숙함이 존재하는데 이는 작화의 필체보다 주제가 이끌어 가는 역동성에 주안점을 두는 게 타당하겠다. 그럼에도 두 작품을 굳이 같은 선상에 놓자면 필자는 아키라(1988)의 표현력이 좀 더 고급지고 현실감 있으며 세밀한 특징이 있음을 얘기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2017년 현 시점에서 바라봤을 때 아키라(1988)가 셀 애니메이션임을 감안해 조금은 어색한 움직임과 낮은 화질을 인지한다 할지라도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표정, 그리고 도시의 배경 등이 타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좀 더 강하고 다채로우며 리얼리티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1988년 시점에서 상상한 2019년의 미래는 분명 현실과 비교해 화려하고 역동적임을 감안했을 때 그러한 상상력의 표현이 아키라(1988)의 붓 터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 없다고 본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아키라(1988)는 셀 애니메이션 방식과 327가지 색상의 사용 등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자한 거대작품임은 분명하지만 2017년 현재의 시점에서 이를 감안하고 시청해도 관객들의 눈높이는 이미 너무나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재개봉한 아키라(1988)를 다시 찾는 관객들은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하고 관람하거나 혹은 재개봉이라는 의미를 단순한 추억 되짚기의 용도로만 활용하기를 추천한다.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사실 이 작품에 대한 관객과 평론가들의 거대한 찬사에 비해 스토리의 단순함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타락한 도시가 붕괴되고 새롭게 세워진 도시 또한 여전히 타락한 채 현실을 벗어날 구멍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청춘의 시기를 길바닥에 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정부는 극비리에 초능력 실험을 시도하지만 이에 대한 배경 설명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극 중에서 “아키라”라는 절대 에너지는 타락한 문명에 대한 청소년들의 반항심이 표출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반정부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케이의 대사에 묻어난다.

  “아키라는 절대 에너지를 의미해. 파충류, 물고기, 플랑크톤, 아메바에도 큰 에너지가 있을 테지. 우주의 먼지가 있었다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까. 뭔가 잘못되어 아메바 같은 것이 인간과 같은 힘을 갖게 된다면...”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는 미래 사회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시각과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사회 전환적인 관점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측면에서 좀 더 세부적인 논의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미래 사회를 디스토피아적인 시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체제의 전환을 통해 희망적인 유토피아적 이상을 지향하고 있음은 아키라(1988)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주의의 정체성을 다소 흐리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라(1988)가 보여준 기술적인 도전과 진보,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표현력 등은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강렬함을 보여주었다. 이후부터 지금까지 제작되는 모든 애니메이션들은 아키라(1988)가 남기고 간 인상을 뛰어넘기 위한 도전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아키라(1988)의 충격 속에서 벗어날 그 날을 기다린다는 건 어쩌면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