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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2
2018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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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첨밀밀(甛蜜蜜)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의 포스터 – 네이버 영화 출처
글. 이동기(대외협력사업화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흔하디흔한 멜로 영화가 최근 흥행의 중심에 놓여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다시 말해 SF나 액션 장르보다 만들기가 훨씬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특별한 CG(Computer Graphic)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규모에 걸맞은 예산이 투입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적다보니 각본을 쓰고 촬영을 준비하는 제작 과정 또한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라는 생각 때문에서 일거다.

 남들이 연애하는 얘기를 들여다보는 건 참 재밌는 일이다. 그 만큼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나와 네가 한번쯤 경험하는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영화 소재로 장점이 될 수도 있고 한 편으로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접근하고 해석하는 방향이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장점이 더 클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신 영화계의 흐름은 멜로물로 흥행에 도전하는 걸 꽤 주저하는 분위기이다. 이는 수십 년간 우려먹은 뻔한 남녀의 연애사가 더 이상의 신선함과 감동을 전달하기엔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이 이미 그 수준을 달리한다는 주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필자도 최근에 멜로물을 시청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한편으로 멜로에 관심이 갈 정도의 나이가 이미 훌쩍 지나버렸다는, 그래서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린 측면도 없지 않아 있겠다. 문득 머릿속에 떠올려보니 그나마 ‘러브스토리(1970)’나 ‘사랑과 영혼(1990)’, 국내에서는 ‘접속(1997)’과 ‘편지(1997)’ 정도의 고전 영화 몇 편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 시점에서 꽤 흥미로운 리뷰 요청을 받았다. 대학 시절 접했던, 이미 이십여 년도 넘은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가물거리기만 했는데 연애에 서툴렀던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다시 한 번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꺼내든 이 영화가 필자에게 새로운 흔적을 남겼을까? 지금부터 그 얘길 해보고자 한다. 진가신 감독의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이다.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진가신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어느 한 장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멜로와 액션, 코미디와 공포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 그의 넓은 스펙트럼은 일반적인 장르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다채로운 카메라 시선을 보여주며 그만의 탁월한 연출력을 자아낸다. 필자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점은 스크린 속 곳곳에 녹아있는 다양한 미장센(Mise en Scene)이었는데, 미장센의 대가라 불리는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조차도 울고 갈 정도의 정말 영화 전체를 진가신 감독 특유의 수많은 미장센들로 채워 넣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 미장센(mise en scene) - 네이버 두산백과 참조
  • - 연극과 영화 등에서 연출가가 무대 위의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배열하는 작업. 영화에서는 카메라에 찍히는 모든 장면을 사전에 계획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화면 속에 담기는 모든 조형적인 요소들을 의도를 가지고 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테면, 세트, 인물이나 사물, 조명, 의상, 배열, 구도, 동선, 카메라의 각도와 움직임 등도 포함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모처럼 흑백화면으로 시작된다. 좁아터진 열차 속에서 곤히 잠에 빠져 있던 소군(여명 분)이 열차가 광동역(카오룽역)에 도착한 후 뒤늦게 잠에서 깨어 부랴부랴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리고는 역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도시로 올라가는 장면이다. 시점과 장소의 전환을 나타내는 블랙아웃 후 이때부터 화면은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게 되는데, 여기서의 화면 전환은 중국의 본토 무석에서 홍콩 드림을 찾아 건너 온 소군의 시각과 마음을 간접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이다. 이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일보, 즉 단순히 환경 변화만을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뛰어든다는 시대 배경적 암시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모를 찾아 방문한 윤락업소 씬(Scene)에서도 확인되는데 철문 앞에서 고모를 찾는 소군과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굵은 두께의 철창이 가로 막고 있고 또한 양쪽의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단절된 대화가 이어진다. 이 장면에 대한 할애는 현실적인 홍콩의 모습과 소군의 기대감 사이의 거리를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 배경 얘기가 잠깐 나왔으니 여기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를 해볼까 한다. 당시에는 아메리칸 드림처럼 홍콩 드림을 꿈꾸고 돈을 벌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넘어 간 젊은이들이 많았다. 소군은 물론 그의 친구가 된 이교(장만옥 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이 꿈꾸는 홍콩 드림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를 테면 소군은 애인 소정(양공여 분)과의 안정된 삶을 꿈꾸며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온 순수한 청년이다. 순박한 눈빛과 어눌한 행동 등은 중국 본토에 대한 감정을 채 버리지 않은 모습이라 하겠다. 이에 비해 이교는 하루 빨리 돈을 벌어 성공하는 게 목적인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스타일이다. 광저우 출신임을 숨긴 채 빠른 시간 내 영어를 습득하는 등 본토의 색깔을 지우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모은 돈으로 노점상을 차릴 때 본토 중화권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故 등려군’의 음반을 선택한 건 마음속에 아직까지 본토에 대한 감정을 채 지우지 못했다는 그녀의 속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감독은 이처럼 장면마다 다양한 표현과 시선, 그리고 배치를 통해 그 만의 독특한 미장센을 구사했는데 눈에 띄는 몇 가지를 좀 더 얘기해보자.

 우선, 소군의 ‘자전거’를 얘기할 수 있겠다. 이 자전거는 단순히 그의 ‘업무용’ 자전거를 넘어 이교와 함께 일상을 보내는 일종의 ‘연애용’ 자전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운전대를 잡은 소군의 움직임과 페달을 밟는 그의 발놀림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군이 자전거를 운전하고 그 뒤에 함께 올라 탄 이교의 모습을 카메라 시선은 측면에서 함께 이동하며 비춘다. 이때의 배경음악은 영화의 타이틀이자 중요한 역할을 하는 ‘故 등려군’의 ‘첨밀밀(甛蜜蜜)’이다. 자전거의 손잡이를 쥐고 운전하는 소군의 움직임은 매우 가볍고 경쾌한데 뒷자리에 앉은 이교가 발을 흔드는 모습 또한 이와 맥락이 같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감정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함과 동시에 영화의 방향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전거가 어떤 방식으로 미장센으로 자리하게 되는지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또 하나는 조금 전 얘기했던 당시 중화권 최고의 가수인 ‘故 등려군’이다. 이교는 홍콩 드림을 쫓아 가장 먼저 본토의 색깔을 벗어 던진 인물이다. 열심히 일을 해 모은 돈으로 소군과 함께 ‘故 등려군’의 음반을 판매해보지만 두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음반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교는 결국 소군에게 자신도 본토의 광저우에서 넘어왔다고 고백하는데, 결국 이 둘은 비와 더불어 그 날 밤을 함께 하게 된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지만 의외로 이때의 배경음악은 발라드처럼 사랑스럽고 잔잔한 음악이 아니라 경쾌하고 빠르게 마치 빗방울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신나게 흘러간다. 여기서 ‘故 등려군’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간간이 흔적을 드러내며 이 둘을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또 하나의 미장센을 눈여겨봤을 것 같다. 두 사람이 함께 현금인출기의 잔액을 확인한 후 그 때마다 공통적으로 지나치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Nobron & Company Opportunity Furniture Store'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평면적 시선을 착용한 이 장면에서 단순히 간판만 눈에 들어왔다면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다. 이 가게는 두 사람이 지나칠 때마다 문이 열려 있는데 우연스럽게도 이교의 주식투자가 실패하면서 잔고가 바닥을 치고 난 후에는 문이 닫혀 있다. 경제 상황의 반전을 돌려 표현한 감독의 간접적 메시지이다.

 주식투자 실패 후 안마업소에 취업해 안마사가 된 이교가 세상에서 쥐를 가장 무서워한다는 얘기를 들은 구양표(증지위 분)는 어느 날 등에 ‘미키마우스’ 문신을 하고 그녀를 찾아오는데, 이때 한 동안 웃음을 잃었던 이교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그녀를 맘에 들어 하면서 환심을 사기 위한, 즉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접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그녀에게 다가올 또 다른 변화를 나타내는 감독의 미장센이다. 구양표 역시 여태까지 유지해왔던 자신만의 생활 방식에 변화를 줬고, 그녀 또한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에 그녀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쥐가 그녀의 하루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스토리 자체의 흐름에서 관객들이 보고 듣고 상상해왔던 내용을 넘어 반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살짝 틀어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지금까지 얘기한 감독의 미장센들을 내용 전개를 방해하지 않고 연결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독특한 카메라 시선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가신 감독은 배우들의 감정을 굳이 대사로 표현하려 애쓰지 않았다. 이를 테면 일자리를 구했을 때의 소군의 기분을 그의 발걸음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시선으로 대변한 게 대표적 예이다. 갑자기 날아온 배구공, 그리고 그 배구공을 치자마자 화면이 블랙아웃되며 소군의 발걸음을 비추는데 이 장면은 아까의 자전거와 함께 소군의 기분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다. 그리고 감독 특유의 수직적 화면 시선이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는 소군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기분 좋게 걸어가는 그의 빠른 발걸음을 관객들의 시선에서 쉽게 바라보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교와의 첫 만남은 맥도날드 패스트푸드점이다. 소군은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순박한 시골 청년의 순수한 모습이고, 이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느 정도 영어도 익숙해진 그래서 홍콩에 적응을 이미 마친 조금은 닳을 때로 닳은 거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는 양쪽으로 시선을 나눠 두 사람을 비춤으로써 대비되는 그들의 성향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진가신 감독 특유의 연출 방식은 특별한 대사나 표정 연기 없이 카메라 움직임, 방향, 물건의 배치 등을 통해 해당 씬(scene)의 분위기를 충분히 흠뻑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데 일조한다. 이와 같은 장면은 또 하나 있다. 이교의 꼬임에 빠져(나중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지만) 영어학원에 등록한 소군이 영어교사 제레미(크리스토퍼 도일 분)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다. ‘How are you?’를 외치는 그와 소군 사이의 거리가 꽤 멀어 보이는 걸 의식한 관객이 있다면 당시 소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어느 날, 소군은 소정에게 선물할 팔찌를 구입하면서 이교의 팔찌도 함께 구입한다. 이때 점원에게 그녀가 안마사라는 말을 무심결에 내뱉는데, 이 때문에 화가 난 이교는 귀금속 가게를 나오자마자 세심한 배려가 부족했던 그를 질책한다. 그는 그녀에게 나름의 변명을 해보지만 그녀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소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있는 그녀의 이유 있는 투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의 테이크(Take)는 꽤 긴 편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매우 흔들린다.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 격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시선 처리이기도 하다.
  “나의 이상은 너와 달라. 우리는 두 종류의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이 말을 내뱉은 이교의 시선은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왔다갔다하며 스스로 안정감 없이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횡단보도의 한 가운에 멈춰 선 소군을 카메라는 다시 한 번 위에서 아래로 수직 방향으로 내려다본다. 시선 전환을 통해 배우의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 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절묘한 시선 처리 방식이 아닐 수 없겠다.

 이처럼 이 영화는 애정 프로세스를 다루는 멜로물이라고 해서 스토리의 전개와 배우의 감정을 단순히 사건 만을 통해 풀어내지는 않는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멜로물은 보편적으로 특별한 특수효과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 어떤 장르보다도 배우의 감정 흐름을 시선과 행동, 대사와 화면 배치 등을 통해 장면마다 표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다 완벽한 시나리오와 완벽한 연출력, 그리고 배우의 연기력이 동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의 소견으로 진가신 감독은 이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에서 자신의 모든 실력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춰 그 능력을 표출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첨밀밀(甛蜜蜜, 199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사랑은 타이밍이다. 처음 홍콩에 왔을 때 누우면 잠들고 눈뜨면 일했지만 사는 게 즐거웠다고 말하는 소군의 내레이션. 하지만 지금 함께 있는 소정과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소정은 소군과 이교의 사이에서 철저하게 조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소군과 이교가 어떻게 다시 엮어질 수 있을까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故 등려군’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다 꺼져가는 잿더미에 불을 다시 불어넣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소군을 보낸 후 운전석에 엎드리다가 크락션을 울리고 마는 이교. 멀어져 가던 소군이 다시 돌아오고 두 사람이 키스를 하게 되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귓속에 흐르는 음악의 볼륨은 마구 커져가기만 한다. 불씨가 다시 지펴졌다고 봐야 하는 이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 시선은 하늘로 올라가고 이들을 내려다 보는데, 이 또한 앞에서 언급한 해석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어 놓았다. 다시 이어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경찰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잠시 피하려 하는 구양표에게 잠시 얘기를 하고 돌아오겠다던 이교는 결국 소군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일까. 화면은 이윽고 1993년 가을의 뉴욕을 비춘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소군의 모습, 여기서 그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전거는 그가 처음 홍콩에 도착해 배달 일을 하게 되면서 타기 시작했다. 일을 할 때의 즐거움과 이교를 만나면서 항상 그녀와 함께 했었던, 그래서 그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미장센의 한 요소로서 작용했다. 하지만 이후 소정의 등장으로 인한 감정의 흔들림 속에서 그는 자전거를 점차 타지 않게 됐고 결국 그 자전거는 녹이 슨 채로 방치되고 말았다. 그랬던 그가 뉴욕으로 건너 가 다시 자전거를 타게 됐다는 건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안정권에 접어들고 있음을 표현하는 방증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故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언론 매체의 보도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이 거리를 배회하다가 텔레비전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장면이다. 놀람과 더불어 어색함 속에서 묻어 나오는 두 사람의 미소까지, 그 배경에는 ‘故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네)’과 ‘첨밀밀(甛蜜蜜, 꿀처럼 달콤하다)’의 선율이 함께 흐른다. 필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두 곡의 음악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본다.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이 홍콩 드림을 꿈꾸는 시대 배경을 중심으로 그 흐름에 적응하려는 두 남녀의 사랑을 감독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여기서 섬세하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배우들의 연기가 단순히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대사와 연기를 넘어 곳곳에 배치된 미장센과 카메라 워크 등 다양한 요소들을 동반해 장면마다의 감정 변화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가장 진솔하게 표현한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현대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 모두 반복된 우연(偶然)이 만들어낸 필연(必然)의 섬세함을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이 영화를 통해 한번쯤 1996년 그 해의 감성으로 되돌아가 보는 것도 어쩌면 좋을 것만 같은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