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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33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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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싸워야 할 것은 적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1917

영화 ‘1917’의 포스터 – 네이버 출처
글 - 이동기(대외협력실)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은 뭐라 해도 현장감을 오롯이 화면에 담아내는 사실감의 표현에 있다. 배우의 뛰어난 연기, 완벽한 무대의 마련, 분위기를 연출하는 효과, 이들을 잘 버무릴 줄 아는 감독의 연출력까지. 이러한 요소들이 한데 모여 이루고자 하는 건 현장을 관객의 눈앞에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는 사실감이다. 이를 위해 많은 스태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다. 여기서 이와 같은 구성을 한 눈에 담아내는 건 카메라의 힘이다. 수많은 요소들로 만들어진 현장의 기운을 어떻게 잘 담아내느냐의 마지막에는 결국 피사체를 바라보는 눈, 즉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이 지닌 역동성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카메라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현장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가 그렇다. 샘 멘데스 감독의 실력이 여실 없이 드러난 작품, 영화 <1917>(2019)이다.

영화 ‘191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명성과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영화의 초반 몰입 수준은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다. 불필요한 장면은 최대한 배제하고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 수 있도록 인물과 대사, 카메라 동선과 배경, 심지어 사운드까지 고퀄리티를 내는데 집중했다. 여기에 ‘원 컨티뉴어스 샷’ 촬영기법을 사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이어 붙였을까 궁금할 정도로 완벽에 가깝도록 현장을 그대로 눈앞에 가져다 놓았다. 작전은 단 하나, 인물은 둘. 단순하고 간결한 구성이 관객들로 하여금 전장의 내음을 그대로 빨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정말 총 소리 하나, 고통에 가득 찬 신음소리 한 번 없이도 모든 화면을 최고의 긴장감으로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두 주인공이 명령을 전달받고 독일군이 후퇴한 참호를 지나게 되는 초반 약 30여 분간의 러닝 타임은 관객들이 자칫 지루해질 가능성이 엿보이는 시간이다. 짧고 단순한 목표와 일상적인 대화, 단조로운 구성에 관객들이 익숙해지기 전이기 때문이다. 샘 멘데스 감독은 지나치게 잔잔해진 기운과 간결한 스토리를 조금씩 흔들어대며 관객들의 감정을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아군 비행기들,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쥐와 시체, 적군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저택과 참호, 자주 등장하는 능선 등이 여기에 사용됐다. 덕분에 관객들은 눈과 귀를 쫑긋 세우고 온 신경을 화면에 그리고 전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스토리를 좇는 것조차 어려운 전장의 한 복판에서 화면 곳곳의 구성 요소에 모든 신경을 모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191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모든 장면의 각 요소들은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는다. 쏟아지는 총알 세례를 요리조리 잘도 피하거나 절대 죽지 않는 초월적인 히어로의 모습은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비쳐지지 않는다. 감독은 전작인 <007 스카이폴>(2012)을 화려하게 채워 넣었던 허스키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매, 섹시한 매력의 제임스 본드와 같은 주인공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추락한 독일군 조종사를 구하려다 오히려 칼에 찔려버린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 분)가 단 한 칼에 죽음을 당하는 건 지극히 현실적인 연출이다. 이 작품은 ‘원 컨티뉴어스 샷’ 기법을 통해 보다 사실적인 묘사로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수많은 수상 실적과 아카데미 촬영상, 음향믹싱상, 시각효과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결코 어색하지 않다.

 친구를 잃고 혼자 남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분)의 외로운 발걸음은 곧이어 만나게 되는 연대와 함께이다. 이 만남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큰 역할을 배분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덕분에 관객들은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등장은 이야기 전개의 흐름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에 그칠 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너진 다리를 앞에 두고 그들과 작별을 고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적군의 총성은 휴식을 가진 긴장감을 그대로 이어놓는 제대로 된 역할이다.

영화 ‘191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이게 이 작품의 연출 묘미다. 좀처럼 긴장을 풀어 젖힐 여지를 주지 않는다. 모든 작품에는 오르내림의 고저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덜미조차 내어주지 않는다. 방심할 틈 없이 날카롭고 세세하게 파고들면서도 기존의 톤을 그대로 쭉 밀고 나가는 뚝심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직선적인 긴장만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줄곧 한 방향을 향해 꿋꿋하게 상승 고도를 올라 태우는 그 연출적 긴장감은 샘 멘데스 감독 특유의 실력을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조명탄이 터지며 쏟아지는 총알 세례를 피하며 앞을 향해 뛰어가는 스코필드의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최고의 명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음악상, 남우주연상까지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장면을 그대로 비춰냈다. 시간과 공간, 시각과 청각적 요소를 아름답게 조화시켜 화려하고도 돋보이는 영상미를 이끌어냈다. 최소한 그 어떤 작품에서도 쉽게 느끼지 못한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프지만 거룩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순간을 내리 깔아놓는 장엄한 음악은 마치 영화 <왓치맨>(2009)에서 오지맨디아스(매튜 구드 분)를 배경으로 빗속을 뚫고 흐르는 레퀴엠의 그 선율처럼 무거운 무게와 책임에 대한 억누름을 강하게 내리 꽂는다.

영화 ‘191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정신없는 전장 속 쫓고 쫓기는 와중에 만나게 된 여자와 아기를 통해 한숨을 돌리는 건 이 또한 한 템포 쉬어가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지금까지 끌고 온 쌓아둔 긴장감을 반감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방식에서 조금은 벗어났다면 오히려 훨씬 새롭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텐데, 마치 영화 <퓨리>(2014)에서의 그것처럼 전쟁터에서 잠시나마 심신의 휴식을 표현하려는 듯 무리한 이야기 전개를 가져감은 개인적인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 긴장감을 미처 놓을 수 없다는 듯 손아귀에 다시금 힘을 주며 강하게 터뜨릴 줄 아는 악력을 가졌다. 강에서 겨우 살아남아 그가 엎드려 터뜨리는 울음은 감정의 곡선을 강렬하게 대변하는 뒷모습이 됐다.

 ​드디어 만나게 된 데본즈 2연대와의 조우는 특별하기보다는 그를 향한 찬송가다. 노래 가사를 귓가에 배경으로 깔며 뒷모습을 지나 앞모습으로 옮겨가는 카메라 워크는 기가 막히게도 노랫말과 어우러져 전쟁에 지친 병사들의 심정을 강하게 대변해준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묵묵히 달리는 병사들의 희생정신은 물론, 전쟁에 대한 가치와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 또한 제공해준다 하겠다. 이런 점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와 유사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데, 잘 드러나지 않았던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샘 멘데스 감독만의 의미와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 ‘1917’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맥켄지 대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을 찾아 마지막 300여 미터를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영화 속 가장 치열하고 긴박한 압권을 보여준다.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끝까지 가는 것 뿐.’이라고 얘기하는 멕켄지 대령의 말이 많은 여운을 남기는 건 당시의 상황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 순간을 스크린 속에 그대로 옮겨 담았던 이유가 됐다. 그 어딘지도 모를 끝까지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희생됐고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전 세계가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가. 샘 멘데스 감독은 치열하게 달려온 스크린 속 열정의 기운을 끝에 다다라서야 침착하게 낮춰버린다.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동생의 죽음을 전할 때 그때 그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청춘은 무엇을 위해 끝없이 달리고 무엇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고 있는가. 가장 치열하고 가장 긴박한 전장의 한 복판에서 살아있는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이 작품과 함께 한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