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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3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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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앞에 무릎 꿇은 역사를 마주하고... 이중간첩

영화 ‘이중간첩(2002)’의 포스터 – 네이버 영화 출처
글. 이동기(대외협력사업화실)

 단 세 편의 영화로 대한민국 영화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는 찬사를 듣는 이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는 바로 강제규 감독이다. 훤칠한 외모와 수준 높은 연기력으로 많은 인기를 몰고 다니는 유명 배우도 아니고, 그저 평소에 조용히 각본을 쓰거나 촬영장에서 낮은 톤의 목소리를 외쳐대곤 하는 차분한 성격의 영화감독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6년 감독 데뷔작을 통해 국내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이른 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오늘은 왠지 다른 때보다 좀 더 서론이 길어질 것만 같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은행나무침대(1996)’이다(‘공포특급(1994)’은 극장개봉작이 아니기에 제외했다). 데뷔 전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게임의 법칙(1994)’ 등 누구나 한번쯤 제목을 들어봤음직한 굵직한 영화들의 각본을 집필한 바 있다. 그랬던 그가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를 통해 감독에 데뷔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필력 외에도 그의 개성 있는 연출력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전생과 현세를 오가는 판타지 멜로의 서막을 알린 이 작품은 그 해 흥행 1위의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작품은 아니었다. 성공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이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성공이었다는 얘기이다.

영화 ‘은행나무침대(199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그가 1998년 내놓은 두 번째 작품 ‘쉬리(1998)’는 한국영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는데, 남북 분단의 현실을 마주한 한반도의 긴장감과 이에 대한 감독의 이데올로기적 견해를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력과 영상미로 잘 표현했고, 이와 함께 등장인물 간의 적절한 멜로까지 가미해 다양한 연령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이 영화 ‘쉬리(1998)’ 이후 한국영화들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도 그때쯤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을 거다. 그 동안 ‘사랑’과 ‘청춘’, ‘반항’ 등 지극히 건전하고 일상적인 우리 네 삶을 소재로 다루던 한국영화계의 흐름은 이 작품 이후 조금씩 실험적인 성향을 띠면서 급격히 바뀌게 됐다.

 그건 우리 영화계가 그 동안 블록버스터를 다룰 정도의 기술과 실력이 부족했기보다는 국내 관객들이 아직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다시 말해 관객들이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못되었다는 건 결국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의 홍수를 넘지 못하고 말이다. 강제규 감독은 영화 ‘쉬리(1998)’의 각본을 쓰고 난 후 그의 아내(배우 박성미 분)에게 심한 혹평을 들었다고 한다. 한 동안 금전적인 벌이를 하지 못하고 각본 집필에 급급했던 남편이 기껏 써온 각본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객기에 지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남편이 어렵게 쓴 각본이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영화 ‘쉬리(1998)’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 필자는 개인적으로 강우석 감독의 영화들을 즐겨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감독을 두고 영화를 넘겨짚는 선입견이 생겨난 건 그가 연출한 영화들이 특유의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영화의 중간 중간에 유머 요소를 제법 집어넣는 연출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굳이 얘기하자면 필자가 일본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와도 같다. 단순히 스토리상에서 유머를 몇 번 끼워 넣는 정도가 아니라, 캐릭터 자체에도 유머를 전담하는 역할을 배정해 극의 긴장감과 몰입을 방해하는 건 필자가 영화를 보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다(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성향일 뿐이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성향은 이와 반대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강제규 감독의 영화들은 또 좋아한다는 특징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세 번째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3)’에서 받은 인상을 필자는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아주 길게 강제규 감독과 그의 영화들에 대한 썰을 풀어놓았다. 사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영화는 이와 전혀(?) 무관하다. 우스운 소리이겠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등장을 내세우는 ‘쉬리(1998)’와 비슷한 배경에 강제규 감독과 유사한 연출 코드를 가지고 있는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득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북한의 핵 공격에 대한 공포로 세계의 이목을 모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해 지금은 종전선언과 한반도 통일을 비롯해 세계 평화까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은 과연 핵 공격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평화체재에 돌입할 수 있을까. 그런 측면에서 문득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영화 하나가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 ‘쉬리(1998)’와 너무나 흡사한 색깔을 가졌기에 객관적인 비교는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야 오늘의 영화를 끄집어낸다. 김현정 감독의 네 번째 작품, 영화 ‘이중간첩(2002)’을 아주 조금만 얘기해볼까 한다.

영화 ‘이중간첩(2002)’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영화 ‘이중간첩(2002)’은 영화 ‘쉬리(1998)’가 개봉된 지 약 4년 후 관객들에게 공개됐다. 필자는 이 영화를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딱 중간에 위치한 작품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유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장점, 다시 말해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서사 구조를 통해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키고 이 과정에서 코미디와 공포, 서스펜스, 스릴, 멜로 등 다양한 장르를 만들어내는 정형화된 형식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그 속에 함몰되어 있는 한 사람의 나약한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좀 더 치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객들은 영화의 타이틀 만으로 전쟁 역사가 한반도에 남기고 간 상처의 묘사를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 보다 상처의 표현을 입체적 공간에 무자비하게 갇혀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는 한 개인의 묘사를 통해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영화의 서사 구조는 전쟁을 통해 가족을 잃고 또 그 가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개인을 묘사한 영화 ‘국제시장(2014)’과 유사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슬픈 개인사의 묘사를 통해 전쟁을 겪지 못한 관객들에게 현실적 아픔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그 것과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오히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남파간첩이 이념에 충성했지만 그 이념으로부터 배신당하는 다소 거리감이 존재하는 현실적 모순 구조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옳다. 여기서 중요한 건 표면적으로는 개인의 심리적 갈등 묘사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이념 대립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이중간첩(2002)’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이 영화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남파간첩 임병호(한석규 분)는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고, 윤수미(고소영 분) 또한 현실과의 괴리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의 공작원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송경만(송재호 분) 역시 남쪽에서의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살인까지 서슴지 않으며 이념을 지키는데 노력했다. 백승철(천호진 분)은 임병호를 끊임없이 시험했지만 차후에는 그를 신뢰하고 보듬어 주었고, 이상욱(류승수 분)도 임병호를 친형처럼 따르며 그에 대한 믿음을 다졌다.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 하나 어긋나거나 잘못한 이가 없다는 점에서 이 영화 속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념 앞에서 선을 긋는 건 의미가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출연진 모두가 국내 최고의 배우들로 구성됐기에 그들의 연기를 감히 거론하는 게 우스운 일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살짝 얘기하자면, 영화 ‘쉬리(1998)’를 거친 배우 한석규의 연기는 당시 절정에 달했다. 과장된 제스처 하나 없이 감정의 굴곡선을 표정과 목소리, 행동 하나하나에 담았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성우 출신답지 않게 일관된 진지함으로 승부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가 드라마를 넘어 영화계에 뛰어든 첫 번째 작품은 1995년 로맨스를 표방한 코믹물 ‘닥터봉(1995)’이었다. ‘은행나무침대(1996)’를 통해 좀 더 깊이 있는 역할을 맡은 그는 ‘초록물고기(1997)’와 ‘넘버3(1997)’로 성우 출신의 다소 무거운 목소리도 제대로 된 카멜레온이 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필자는 그의 연기가 일정한 위치를 잡게 된 영화로 ‘접속(1997)’을 꼽는다. 상대 배우인 전도연과의 로맨스를 당시 유행했던 PC통신을 통해 가장 현실적으로 풀어내면서 많은 이들의 공감과 흥행을 함께 이끌었다. 다음 해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1998)’는 한석규 식 슬픈 사랑 이야기의 대표적 작품이 됐다. 사랑과 죽음을 한 곳에 모아두고 현대판 신파극을 내세운 연기로 그는 이른 바 대세 배우로 자리 잡았다.

영화 ‘이중간첩(2002)’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어쩌면 그가 영화 ‘이중간첩(2002)’과 같은 고정된 이미지를 갖게 된 건 영화 ‘쉬리(1998)’에서의 유중원 역할이 한 몫 했기 때문일 거다. 이후 ‘텔미썸딩(1999)’은 이미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배우 심은하와 함께 ‘쉬리(1998)’에서의 역할과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했던 게 아닌 가 추측해본다. 그의 이러한 도전이 한 박자 쉬어가는 듯싶다가 마무리된 것이 바로 영화 ‘이중간첩(2002)’이다. 분명 ‘이중간첩(2002)’에서의 그의 연기는 ‘쉬리(1998)’와 ‘텔미썸딩(1999)’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러한 역할의 커다란 높이는 지금까지 언급한 여러 장르에서의 연기가 하나씩 쌓이고 적층되어 폭발한 거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양성도 존재하지만 하나의 역할에서의 자리매김이 그가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게끔 보다 더 쉽게 만들었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연기가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걸 관객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곳곳에 녹아있는 그의 다양성의 높이가 그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 또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변신의 신호탄이 이후 2004년 작, ‘그때 그 사람들(2004)’이다. 여전히 진지를 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철저하게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다. 진지함으로 제대로 된 코미디를 보여주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표현 방식’에 대해 얘기를 했으면 한다.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주인공 임병호가 북에서 내려온 남파공작원, 이른 바 간첩임을 너무나 쉽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병호의 표정과 말투, 행동 등은 남파공작원의 이미지를 철저히 숨긴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남쪽의 자유민주주의의 분위기에 동화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사람이 북에서 내려올 당시의 감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혹은 남쪽의 자유민주주의에 동화되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 정도로 배우 한석규의 연기는 꽤 차분하다.

영화 ‘이중간첩(2002)’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이러한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바로 윤수미의 등장이다. 그녀가 임병호에게 처음으로 접근하는 접신 방식은 라디오인데, 이때부터 관객들은 ‘아, 이들이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었지’하며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지금까지 차분하게 연기를 해 온 한석규가 드디어 북에서 내려온 남파공작원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이는 윤수미와 송경만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역할이 비록 크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기 또한 비교적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어디로 튈지 보다는 누가 봐도 안정된 그들의 눈빛이 어떻게 살인을 쉽게 저지를 수 있을 정도의 광기 어린 남파공작원으로 바뀔 수 있을까에 눈길이 쏠린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감이 쉽게 충족되는 장면은 불행히도(?) 없다. 여기서 감독의 영화 속 의도적인 표현 방식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첩의 모습은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 속 임병호의 철저한 이미지 변신, 윤수미의 다소 어색한 연기력(정확히 말하면 배우 고소영), 송경만의 이념에의 충성이 관객들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 부분 등은 앞에서 언급한 선과 악의 무의미한 구분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김현정 감독의 연출 방향을 쉽게 읽을 수 있다.

 필자는 남과 북의 거부 사이에서 제 3국으로 도망가는 임병호와 윤수미의 발걸음, 그리고 임병호의 마지막 인생을 보면서 이념이 만들어 낸 두려운 부분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선에 놓인 그들의 도피 생활을 두고 모처럼 필자가 즐겨 듣는 故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의 선율이 떠올랐다. 우연일까, 창 밖에는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