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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5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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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물결이 사랑으로 변할 때...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포스터 – 네이버 영화 출처
글. 이동기(대외협력사업화실)

 美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2000년대 초반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원투펀치’라는 말을 만들어낸 이들이 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 팀의 ‘랜디 존슨(Randall David Johnson)’과 ‘커트 실링(Curt Schilling)’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그들이 마운드에 나설 때면 믿고 보는 승리 게임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실제 그들의 등장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팀의 1선발이었던 랜디 존슨은 1999~2002년까지 무려 81승을 거두며 4년 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2선발이었던 커트 실링 또한 2001~2002년 동안 45승을 거두며 커다란 활약을 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해도 두 사람이 만들어낸 승수는 가히 놀랄만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영화에서도 믿고 보는 배우들이 있다. 감독의 연출력과 뛰어난 각본, 실력 있는 배급사 등을 따지지 않고, 단지 그가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야기에 녹아들 수 있는 뛰어난 연기력을 느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필자에게 믿고 보는 배우는 ‘마이클 패스벤더(Michael Fassbender)’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의 에릭 랜셔(매그니토) 역에 다소 아쉬움을 표현한 적도 있지만, 프로메테우스(2012)를 비롯한 에이리언 시리즈와 노예12년(2013), 프랭크(2014) 등 다수의 작품에서 보여줬던 그의 감정 연기는 아직까지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앞뒤 따지지 않고 들여다 본 이번 작품 또한 그러한 인상에 살며시 추가된 듯하다. 시카고 비평가협회상 유망연출상에 빛나는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이, 강렬한 햇볕에 부딪혀 반짝이는 잔잔한 파도의 움직임을 격정적인 이야기로 꾸며내 관객들의 가슴 속을 후벼 파고 있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이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는 M.L.스테드먼의 ‘바다 사이 등대’라는 제목의 도서를 원작으로 한다. 필자는 별도의 원작을 가진 영화를 만날 때면 우선적으로 제목(타이틀)의 변화를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데, 미묘한 차이에서 만들어지는 울림의 변화가 관객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제인 ‘Light Between Ocean’은 변화가 없지만 도서의 경우 ‘등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제목을 선택했다면, 영화는 사건의 전환이 발생할 때마다 화면에 간간이 집어넣은 ‘파도의 흔적’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메시지 소구점(appealing point)의 차이를 고려하고 영화를 바라본다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는 1차 세계대전 후 전쟁 영웅이 된 톰(마이클 패스벤더 분)이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의 외딴 섬 야누스에서 등대관리자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마을 사람들에게 ‘등대’는 종전 후 재건과 번영을 추구하기 위한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딴 섬에 홀로 놓인다는 단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독과 슬픔으로 등대관리자로서의 역할을 견디지 못하고 자주 교체되기도 했다. 전쟁 영웅이 굳이 이러한 등대관리자를 자청했다는 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쉽게 이해해보면 전쟁을 경험하면서 그 치열함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 주인공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쟁을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가 충분히 지쳐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이러한 배경과 구성에 상반된 성향을 가진 상대역을 집어넣었다. 톰의 앞에 나타난 이자벨(알리시아 비칸데르 분)은 현재의 그의 모습과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세상과의 괴리감으로 온 몸에 젖어있던 톰을 점차 밝은 곳으로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두 사람이 부부로 맺어짐은 각자의 성격 차이에서 나타나는 많은 상황과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생기 넘치는 당신의 존재가 나를 두렵게 하고, 당신 덕에 다시금 감정을 느끼게 됐다는 톰의 말은 그녀에 대한 그의 신뢰와 사랑이 깊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는 두 사람이 각자 육지와 섬으로 떨어져 지내는 동안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을 통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상승되고 있음을 빠른 속도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가지는 시간적 제약은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지는 기간을 너무나 짧게 구성해 개인적으로 제법 큰 아쉬움을 남겼다. 이자벨의 갑작스런 청혼은 속도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급하게 진행되어 그 자체만으로도 단점으로 비춰질 정도이다. 빠른 진행은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용이하겠지만 감정 곡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영화의 특성 상, 두 사람의 감정 변화를 이러한 속도로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필자의 사견으로 사치이다. 불행히도 영화는 2시간이라는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많은 분량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감정 변화까지도 관객들에게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친 것 같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다시 한 번, ‘등대’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 등대는 어두운 곳에 홀로 서서 다른 이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사랑하는 아내 이자벨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선택하는 톰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좋은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스토리 구성만 놓고 본다면 ‘마이클 패스벤더’를 캐스팅한 건 탁월한 선택이다. ‘프로메테우스(2012)’와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에서 필자가 이해했던 그는, 감정 표현을 누구보다 적절하게 절제할 줄 아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어쩌면 시간적 제약을 가진 ‘영화’라는 매체보다 ‘TV연속극’과 같은 시리즈에 보다 어울릴지 모른다. 한정된 공간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애틋할 정도로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게끔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한 과정이 너무나 많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의 감정 연기가 과하게 느껴진 건 그러한 이유가 있기도 하다.

 영화는 부부의 결실을 맺고 야누스 섬에서 등대관리자로 살아가던 톰과 이자벨이 2번의 유산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자벨의 아이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상황을 그려낸다. 섬에 태풍이 찾아오고 파도가 거칠어지거나,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부른 피아노 조율사를 의사로 오해하고 남편에게 화를 내는 장면 등은, 그 동안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었던 이자벨이 점차 예민한 성격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이 섬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을 관객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미장센의 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갑자기 떠내려 온 배 한 척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을 한 번에 전환시켜주는 커다란 역할을 한다. 배 안에는 의문의 남자 시체 한 구와 마냥 울고 있는 갓난아기가 놓여 있다. 평소 아이를 애타게 갈구하던 부부에게 갈등 상황을 한 번에 안겨주는 순간이다. 톰은 등대관리자로서 그 상황을 육지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본인이 낳은 아기인척 받아들이고 키우자고 말하는 이자벨에게 설득 당한다. 이러한 선택은 지금까지 필자가 얘기했던 두 사람의 상반된 성향을 비롯해, 톰이 등대관리자로서 수행하는 역할과 그의 성격 등을 그대로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섬의 이름이 ‘야누스’라는 점 또한 이러한 선택을 적절히 뒷받침하는데, ‘야누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수호신으로서 앞뒤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이라고 얘기하는 사람’과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의 대화. 필자가 반복적으로 언급했던 면대면(Face to Face) 대화가 이어지면서 갈등이 고조되는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화자(話者)의 표정을 옆에서 사선으로 바라보며 각기 앞에 서있는 상대방의 뒷모습과 함께, 같은 프레임에 담아낸다. 이때의 카메라는 스토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역할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제 3자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입장으로 만들어준다. 두 사람의 선택은 하나의 생명이 묻혀 있는 무덤의 표지까지 없애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사람의 주장이 비록 상반되지만 최종적인 선택과 이를 행동에 옮기는 건 모두 톰이 마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이후 모든 화면은 모두 섬에서의 가족의 행복을 극대화시키는데 주력한다. 이 행복이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엄청난 것임을 관객들에게 가득 안겨준다. 그 무게가 이렇게나 무거운데 과연 이를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표를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다 하겠다. 아이에게 ‘루시’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지어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톰은 어느 날 육지의 한 공동묘지에서 우연히 아이의 친아빠인 ‘프랭크(리온 포드 분)’의 비석을 발견하게 된다. 카메라가 그의 불행한 가족사를 전해 듣고 있는 톰을 비출 때, 일반적인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비추는 건 어깨 너머 프레임을 통해 감정이 어떻게 흐르는 지를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표정 전체를 읽게 만들기보다 일부분을 숨겨놓음으로써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끔 절제하고 있다. 그가 고민을 하다가 울타리 문을 열고나서는 장면은 이미 결정을 내린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평소 영화를 볼 때 카메라 시선을 의식하며 보는 걸 추천한다. 카메라는 배우의 시선이자 관객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면을 스토리텔링 하는데 있어서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문제가 될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굳이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는 건 그 만큼의 이유가 있어서이다. 아이의 친아빠와 친엄마(레이첼 와이즈 분)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평지가 아닌 경사로인 것도 이 부부의 환경이 제각기 달랐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균형이 맞지 않고 기울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감독의 미장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사실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정리하자면 너무나 무난한 내용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 관객들은 예측 가능한 스토리와 감정 전달에만 의존하는 최루성 장르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다. 더 이상 짜낼 눈물도 없고 말이다. 필자 또한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서, 스토리텔링 자체를 배우 개개인의 연기력에 의존하기엔 영화가 너무나 빈약한 구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이러한 필자의 의중을 읽고 있었다. 감독은 무난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중반 이후부터 크게 비틀기 시작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지금부터 그 두 번의 비틀기를 얘기해보자.

 첫 번째 비틀기는 사건을 이끌어가는 국면의 전환이다. 친엄마 한나가 행방불명된 남편과 딸을 애타게 찾으며 그리워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톰은, 이자벨 몰래 그녀에게 간간이 메모를 남기면서 남편의 죽음과 딸의 안전을 알린다. 이 메모를 발단으로 한나는 딸의 행방을 경찰에 의뢰하고, 결국 수소문 끝에 경찰이 톰과 이자벨을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가 또 다른 두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 갈래는 진실을 간접적으로 털어놓아 자신과 루시를 떼어놓게 만든 남편 톰에 대한 이자벨의 분노와 증오가 그것이고, 두 번째 갈래는 당시 섬으로 배가 떠내려 왔을 때 과연 아이의 친아빠인 프랭크가 살아있었는지 죽어있었는지에 대한 경찰의 진위 가리기이다. 이 말은 곧 사건이 아이가 친엄마 품으로 돌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자벨 대신 모든 죄를 덮어 쓴 톰이 살인죄까지 함께 적용받을 수 있는 중대한 사항에 빠지게 됐음을 뜻한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두 번째 비틀기는 이자벨에게 다가온 달콤한 유혹이다. 이자벨은 남편 톰이 자신 대신 모든 죄를 덮어 쓰고 살인죄까지 적용받을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빼앗긴 허탈감과 남편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지낸다. 그런 이자벨에게 어느 날 아이의 친엄마 한나가 찾아와 자신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를 당신 품으로 돌려주는 대신에 남편의 살인죄를 증언해달라고 요구한다. 정말 기가 막힌 비틀기가 아닌가. 이유야 어찌됐든 남편에 대한 증오가 가득한 상태에서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를 두고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이 장면에서 윤리적인 모범 답안은 논외가 된다. 관객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스토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해질 때,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롤러코스터를 태우며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던 그 무게감을 다시금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필자가 감히 결론짓자면 이 영화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원작 도서인 ‘바다 사이 등대’와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의 제목이 각각의 메시지 소구점에 차이를 두고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여기서 파도가 의미하는 건 ‘용서’이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강한 흔적을 남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거센 상처를 따뜻한 온기로 보듬어 흔적을 지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가 마무리됐을 때 필자의 머릿속에 남은 장면이 하나 있다. 한나의 플래시백(Flashback, 회상 장면) 중, 아기를 바라보는 남편 프랭크에게 어떻게 그렇게 모진 일들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밝을 수 있을까 묻는 장면이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미소와 함께 이렇게 대답한다.

  “용서는 한 번만 하면 되니까. 누구를 증오하려면 하루 종일, 매일 나쁜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니까 그게 더 힘들거든.”

 용서도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올해 가을은 모든 이들의 마음 한편에 거센 용기로 가득한 파도가 한번쯤 밀려와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