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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7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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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군가 당신의 뒤를 밟고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포스터 – 네이버 영화 출처
글. 이동기(대외협력사업화실)

 화려한 액션도 없다. 심장을 조이는 긴장감도 없다. 손에 땀이 나는 스릴도 없다. 쉽게 드러나는 재미마저 없다. 그런데 묘하게 빠져든다.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눈길은 스크린을 떠날 줄 모른다. 이야기가 아주 천천히 흘러가면서도 하나라도 빠뜨리면 이어갈 수 없을까 두려운 까닭이다. 그 만큼 이 영화는 어렵다. 서두를 꺼내기에 앞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론은 얘기해볼만한 영화라는 거였다. 스톡홀름영화제 국제비평가상 수상에 빛나지만 제목부터 좀처럼 감 잡기 쉽지 않은 영화. 오늘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는 1974년에 출판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훗날 작가인 ‘존 르 카레’가 실제 영국의 정보부 MI5와 MI6 요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1973년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로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냉전시대의 유럽을 다룬다. 전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고 해도 무방한 영국의 정보조직 ‘서커스’ 내 요원들의 암투를 그린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스파이 물에 기대할만한 007 제임스 본드 류의 요소들을 담고 있지는 않다. 화려한 첩보 액션을 기대하고 접한 관객들이라면 아마도 백퍼센트 실망할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밀한 두뇌 싸움을 보여주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영상은 오히려 여백의 미를 충분히 채우며 관객들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는 물음표를 달게 만든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필자가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이유는 영화가 그 만큼의 페이크 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을 땐 필자 또한 어느 정도 미장센을 고려하고 이를 해석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스크린이 막을 내리자마자 머릿속의 혼란으로 어지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스마일리(게리 올드만 분)의 호수 수영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는지, 의심되는 인물들을 체스 말에 붙여놓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는지 등 말이다. 차라리 체스 판에서 한두 명 정도는 말을 쓰러뜨려 놓았더라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웠을 거다. 서류봉투가 물품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캐비넷에 이르기까지의 롱테이크 장면은 어떤 의도로 표현된 건지, 이 모든 게 관객들의 시각에서는 결코 쉽게 이해되진 않는다. 나름의 해석을 시도했지만 정말 이러한 이유만으로 많은 시간과 반복된 장면을 할애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설마’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설마’가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정말 사람 잡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서커스의 수장 컨트롤(존 허트 분)의 지시를 받은 요원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 분)가 전향 의사를 보인 헝가리 장군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총을 맞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컨트롤과 그의 부하 조지 스마일리가 조직에서 퇴출당하게 되는데, 이후 수뇌부에 일명 ‘두더쥐’라 불리는 배신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조직 내부에 의심과 분열이 일어난다. 영화는 컨트롤이 병사한 후 수뇌부의 첩자를 찾아내는 임무를 받은 스마일리가 수사를 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스파이 영화로서 구성은 제법 그럴 듯하다. 숨겨진 정보를 둘러싼 내부 조직의 암투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 배신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거기에 이들은 모두 조직의 최고 수뇌부 또는 치열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정예 요원들이다. 이들에게 조직에 대한 신뢰와 배신은 목숨과도 같은 중요한 문제이다. 달리 말하자면 가족에게 신뢰를 잃고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조직이 곧 가족과도 같다는 얘기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면 그 조직은 와해되기 쉽다. 영화는 이러한 소문을 둘러싸고 와해된 조직원들 간의 암투를 잔잔한 분위기와 색깔로 그려내고 있다. 정통 스파이 물로써 제법 긴장감과 스릴을 기대할 법도 한데, 감독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속도에서부터 관객들의 기대치를 확 낮춰 버렸다. 긴장을 만들어내는 구성은 치밀하지만 뭔가 느긋함을 감출 수 없다. 차라리 답답하다는 표현이 좀 더 낫겠지만 영화를 세 번씩이나 본 현 시점에서는 그 속도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페이크 씬은 물론 다양한 여백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답답함을 금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스토리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한 장면이라도 놓치는 순간, 내용의 연결이 쉽지 않을 정도이다. 미장센, 클리셰, 메타포 등 이런 거 따지며 보기엔 감독이 너무나 많이 꽁꽁 싸매고 옷깃만 살짝 열어두었다. 그래서 두 눈 크게 뜨고 귀 쫑긋 세우고 집중해야 한다.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영화 내용조차 이해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릴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은 첩보 영화로서 기본적으로 다뤄야 할 액션과 스릴은 배제한 채 다양한 단서에 집중하도록 떡밥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목적과 이유는 물론, 흘러가는 대사와 배경이 되는 인물, 소품의 세밀함까지 허투루 여길 수 없게끔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폴리아코프(콘스탄틴 카벤스키 분)가 가져오는 소련의 특급 정보에 대한 신뢰가 하늘을 찌르는 위치 크래프트 작전, 칼라가 가지고 간 스마일리의 라이터, 그리고 그 라이터에 새겨진 ‘조지에게 앤이, 사랑을 담아’라는 문구는 짐 프리도의 살해 장면이 담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스마일리가 서커스의 수장으로 복귀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밀하고도 가볍게 발을 걸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전반적인 분위기를 낮게 깔아버리는 OST 또한 한 몫 한다. 수사의 발걸음을 절대적으로 따라가는 다양한 곡들은 관객들의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의 ‘라 메르(La mer)’는 예외로 남겨두고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영화의 숨은 공신은 OST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여기에 화려한 캐스팅으로 치장된 다양한 캐릭터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필자가 소개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못지않게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하지만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이 화려한 캐스팅에만 치우치지 않고 각각의 배우들이 제 역할 속에서 절제된 연기를 펼쳤다면, 이 영화의 캐스팅은 균형이 깨지는 아쉬움을 남겼다. 역할과 절제미를 논하기엔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흐름 속에서 방해 요소가 될 뿐이다. 심지어 스토리텔링 자체가 없는 이들도 있다. 누구는 과하고 누구는 부족한데, 이는 원작 소설의 짜임새 있는 내용을 제한된 2시간 이내에 풀어낼 수밖에 없는 한계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인공 스마일리 역할을 맡은 배우 게리 올드만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건 행운이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절제된 기운이 온 몸에서 느껴진다. 덕분에 이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 1위를 3주 연속 차지했는가 하면, 그 해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음악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까지(게리 올드만) 총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나름 반전을 만들고자 노력한 흔적도 보인다. 시종일관 눈치껏 퍼시 엘르라인(토비 존스 분)을 의심하게끔 덫을 놓고 있다. 팅커(퍼시 엘르라인), 테일러(빌 헤이든, 콜린 퍼스 분), 솔저(로이 블랜드, 시아란 힌즈 분) 등 다양한 역할과 인물을 늘어놓고 친절히 알려주지만,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 각각의 단어들이 극 중 맡은 역할의 성격을 끼워 맞추는데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고 화면 속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영화가 종착역에 다다르며 숨겨진 베일을 조금씩 벗겨주기를 상상한다면 그건 지나친 기대이다. 누누이 얘기했지만 영화가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건 예술도 상품도 아닌 감독의 아집일 뿐이다. 그래서 조금은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겠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출처

 마무리가 아쉬운 점을 덧붙여야겠다. 의심이 가는 이를 지목하고 약간의 페이크로 관객들에게 반전의 놀람과 감동을 선사했다면, 그 뒤는 어떻게 이어지는 게 신선한 결말이 되는 걸까? ‘알고 보니 범인은 누구였다!’ 여기에 더해 ‘알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범인이었다!(실제 필자는 영화의 중반까지만 해도 스마일리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것도 아니면 ‘범인은 과연 누구였을까?’하고 결론을 제시하며 열린 결말을 만들던가! 등의 결말은 이제 너무 식상하다. 이런 흐름이 일반적인 도식화라면 지금껏 이끌어 온 차분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뭔가 익숙지 않은 새로운 마무리를 만들 수는 없었던 걸까? 개인적으로 도식적인 결말을 너무나 당연히 배치했다는 점과 또 밝혀진 범인을 너무나 쉽게 처리해버리는 장면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범인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아껴둔 건 알프레드슨 감독의 의도된 연출이었을지 아직도 궁금함을 감출 수 없다.

이전의 글에서 필자는 동일한 작품을 여러 번 답습하는 스타일임을 밝힌 바 있다. 이는 해당 작품에서 느껴진 감동과 연출이 작품을 접할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거나 여러 번 접해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이었다. 해석 자체가 모호하고 어렵게 느껴진 작품은 아마도 이천 년대에 들어서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을 사람들에게 추천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관객에게 쉬운 연출로 전달력을 높인 작품이 좋다고 분명 얘기했지만, 어려운 작품일수록 대화를 통해 해석하는 묘미 또한 결코 가벼운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가, 눈 깜박할 새 지나쳐가는 낙엽 위로 코트의 깃을 잔뜩 세운 채 스스로 스파이가 된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귓가에 흘리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의 ‘라 메르(La mer)’ 선율이 낙엽 밟는 사부작 소리로 다가와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고 있는 건 아닐는지.

▲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OST - Julio Iglesias ‘La 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