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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47
202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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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모습이 내 최고의 모습이라면... 레이디 버드

영화 ‘레이디 버드(2018)’의 포스터 – 네이버 출처
글 - 이동기(대외협력실)

 반항심 가득한 사춘기 시절, 나를 둘러싼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고 싶어 하는 시기. 하지만 이는 판단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해 주변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렇듯 그 어려운 관문을 거쳐야 진정한 성인으로서 한 몫을 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지만 개개인에게는 한 번 밖에 없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건 무척 어렵다. 이를 다양한 시각에서 표현해야만 하는 배우들조차 이러한 상황은 어려운 숙제다. 물론 작가와 연출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감정의 분출을 잘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의 균형을 맞춘다는 건 참 어려울 것 같다.

 이 영화는 감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건드리는 연출자로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감독 그레타 거윅이 지난 201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카메라의 시선에서 눈에 띄는 배경과 시선을 사로잡는 시각 효과는 없지만, 대신에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 표정 등을 통해 그때의 분위기와 감정을 세밀하게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다시 말해 자극적인 화면은 없지만 자극적인 대사는 충분하고, 화려한 테크닉은 없지만 화려한 스토리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얘기하는 ‘자극적’이라는 표현은 감정의 굴곡선을 제대로 담고 있다는 거고, 또 ‘화려하다’는 표현은 누구나 공감대를 가질만한 평범한 스토리를 담아내는 와중에도 주인공이 경험하는 순간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매력이 제대로 담겨있다는 거다. 화면을 가득 채운 주인공의 개성 만점 스토리를 읽을 수 있는 영화, <레이디 버드>(2018)다.

영화 ‘레이디 버드(2018)’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영화는 미국 서부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언제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미국 동부의 뉴욕으로 진학하고 싶어 하는 열일곱 살 소녀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분)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녀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크리스틴 맥퍼슨’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자신을 둘러싼 가난한 환경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스스로 ‘레이디 버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두운 배경을 숨기는데 급급하다. 하지만 그녀의 가정환경은 물론 학업성적 또한 그다지 좋지 않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까지는 험난한 가시밭길만 가득하다. 이런 그녀를 두고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꿈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한다. 영화는 일상이 거듭될수록 보다 거칠고 부모에게 반항하는 그녀의 사춘기 시절의 단면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많은 공감대를 얻는다.

 영화의 내용은 이러할진대 그렇다고 해서 화면 자체가 너무나 평범하고 차분한 일상으로만 표현되는 건 아니다. 주인공 크리스틴은 조용한 하루를 보내기가 힘들 정도로 매일 같이 사건 사고를 달고 산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야단 법석한 하루는 보는 이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엄마와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자 달리는 자동차에서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든가, 강의 중인 선생님에게 강의 내용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을 날려 학교로부터 정학을 당하는 등 그녀의 요란한 하루는 그 자체만으로 웃음이 가득하다. 물론 그 속에서도 남자친구와의 연애와 이별, 친구들과의 우정과 낭만을 공유하는 모습은 까불고 철없는 사춘기 소녀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그녀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풋풋함도 보여준다.​

영화 ‘레이디 버드(2018)’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이 작품이 관객들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은 이유 중에 하나는, 크리스틴을 중심으로 그녀를 둘러싼 많은 이들과의 관계를 여러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정에서는 크리스틴과 가족, 즉 엄마와 아빠, 남매 사이의 관계를 여러 측면에서 읽어냈고, 학교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 줄리(비니 펠드스타인 분)는 물론, 그녀가 만나게 되는 대니(루카스 헤지스 분), 카일(티모시 샬라메 분) 등과의 관계를 제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각각의 캐릭터가 그녀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엄마 매리언(로리 멧칼프 분)은 언제나 그녀에게 엄격하고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댄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친딸인 그녀가 좀 더 안전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츤데레 스타일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매리언의 행동과 마음은 결말에 다다라서야 진심을 드러내며 그녀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빠 래리(트레이시 레츠 분)는 실직을 하고 우울증에 빠지면서도 자식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뒤로 물러날 줄 아는 인물이다. 미구엘(조단 로드리세그 분)에게 취업 기회를 양보하기도 하고, 크리스틴의 꿈인 동부 뉴욕 소재 대학에 원서넣는 걸 도와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한다. 대니와 카일은 크리스틴이 내적으로 성장하게끔 도와주는 비중 있는 역할을 기대했지만 사실 아쉬움만을 남겼다. 그러고 보면 그레타 거윅 감독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크게 조명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가장 친한 친구 줄리와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아프게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며 그녀의 성장을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배정한 것 같다.

영화 ‘레이디 버드(2018)’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영화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한 어린 여고생의 성장 드라마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유사한 스토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시얼샤 로넌의 연기는 좀 더 세밀하고 디테일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함께 여러 사건들을 거치는 동안 크리스틴의 감정은 그때그때마다 다양한 색깔로 표현됐다. 덕분에 관객들은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작품은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유사한 부분을 많이 가진다. 이를 테면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프란시스 하>(2014)에서 그녀의 뉴욕 생활을 대상으로 직장과 사랑, 그리고 우정 등을 끄집어내어 한 인물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세세하게 이끌어낸 것이라든가, 또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에서의 한 때 뉴욕 생활을 꿈꿨지만 막상 겪어보니 동경했던 뉴요커의 삶이 텅 비어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 등이 그렇다. 결국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결국 뉴욕 소재 대학에 합격해 도시에 발을 딛게 됐지만 지나온 새크라멘토에서의 생활을 돌이켜 보며 지금까지 자신을 수식해줬던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장면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건 이야기의 ‘공유’가 아닌 함께 하는 ‘공감’이다. 그녀가 부끄러워했던 새크라멘토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 그녀를 채워주었던 과정이었고 그녀가 거부하고자 했던 가족의 따갑고 날카로운 잣대는 그녀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진심어린 사랑이었다. 아무리 새 옷을 바꿔 입어도 나의 흔적을 쉽게 지우지 못하듯이 앞으로 걸어갈 방향도 지금의 내가 만들어야 할 숙제이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당초 제목은 <엄마와 딸>이었을 정도로 사실 엄마와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했지만, 실제 영화는 주변과의 다양한 관계와 영향을 통해 성장하는 한 소녀의 내적 성장 이야기를 다루는데 보다 집중했다. 감독 그레타 거윅의 반 자전적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기에, 보다 섬세하고 보다 서정적인 측면에서 영화를 천천히 읽어보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