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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48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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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은 무림으로 바뀐다... 화산고

영화 ‘화산고(2001)’의 포스터 – 네이버 출처
글 - 이동기(대외협력실)

 2001년 추운 겨울, 한남동 단국대 캠퍼스에서 네스카페 캔커피 CF를 찍을 때였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목이 쉴 정도로 레디액션과 컷을 외쳤던 건 그저 내가 원했던 색감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티비에는 배우 임은경 씨가 출연한 TTL광고가 신비주의를 표방하며 마구 흘러나올 때였고, 나 역시 그 느낌을 살리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모델을 맡은 이들은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열심히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연기를 했지만, 내 머리 속은 열악한 현장은 제쳐두고 그저 고집을 부리기에 바빴다. 그때 그렇게 멀어져간 그 색감은 여전히 내 기억 저편에 박혀 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색감이 다시 내게 돌아온 건 이 영화를 접했을 때였다. 밝으면서도 어둡고 어두우면서도 전혀 어둡지 않은 그 색감, 마치 화면 전체가 물이 빠져 축축한 느낌을 드러내는 마냥 신비롭고 재미있는 그 영화. 김태균 감독의 영화 <화산고>(2001) 얘기이다.

영화 ‘화산고(2001)’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2000년대 초반, 당시에는 청춘스타들이 우후죽순 모습을 하나둘씩 드러낼 때였다. 배우 장혁은 필자가 졸업한 학교와 라이벌 고교 출신으로 학창시절부터 익히 소문을 들었던 터였다. 비단 장혁 뿐만 아니라 권상우, 신민아, 공효진, 허준호, 김수로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총출동했으니 세간의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에 코미디와 액션을 동반한 학원무협물이라는 설정은 만화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스토리를 영화로 끌어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90년대 중반, 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던 이우혁 작가의 소설 <퇴마록>이 박광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지만, 소설의 인기를 업고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영화가 한 순간에 몰락하면서 팬들의 기대도 식어버린 바 있다. 이후 이와 유사한 스타일의 영화들이 차례차례 등장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다. 개인적으로 <화산고>는 그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다.

 김태균 감독은 90년대 후반 모 영화사가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을 통해 한 편의 작품을 끄집어냈다. 초기 원작은 영화와는 다른 스타일을 담고 있었지만 나름의 각색을 거쳐 현재의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화면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관객이나 평론으로부터 스토리의 단조로움을 지적받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학원물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부분을 많이 끄집어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액션에 너무 치중하더라도 혹은 인물 간의 관계에 집중하더라도 어느 쪽이든 단조롭다는 지적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학생과 학생 간의 관계라는 기본적인 틀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영화 ‘화산고(2001)’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이야기는 여기에 ‘사비망록’이라는 비문을 던져둠으로써 학생들 사이에 큼지막한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사실 화산고 최고의 고수로 불리는 송학림(권상우 분)도 이 사비망록과 같이 그들 사이에서 그저 미끼일 뿐이다.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큰 역할을 해내지도 못하고 겉에서만 맴돌게 된 점이 조금 아쉽다. 덕분에 주연을 맡은 김경수(장혁 분)는 더욱 돋보일 수 있는 환경을 얻게 됐으며, 여느 학원 무협물이 그렇듯 진정한 주인공의 등장은 초반에는 미미하다가 서서히 그 위세를 드러낸다. 스토리만을 두고 보면, 사비망록을 둘러싸고 송학림의 부재를 틈타 일인자가 되기 위한 학생들 사이의 사투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 측면에서 김경수와 유채이(신민아 분)와의 관계, 김경수와 수학선생(허준호 분)과의 관계, 송학림과 교감선생(변희봉 분)과의 관계 등을 좀 더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인물의 역할만을 본다면, 장량(김수로 분)의 무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인상을 전해준다. 선과 악, 두 가지 모두의 선에서 관객들과 충분히 교감하고 또 공감을 얻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좋지도 밉지도 않은 캐릭터의 색깔은 뒤집어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밉기도 또 한편으로는 끌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독특한 감정을 형성시킨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나면 오히려 주인공인 김경수보다 훨씬 더 뇌리에 각인되는 부분이 많다. 수학선생은 학원오인방을 이끄는 리더로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무공으로 화산고를 빠르게 장악하지만, 이야기 구조상 이들의 몰락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영화가 인물 간의 관계를 앞에 두고 너무 솔직한 방향으로만 달려간 게 영화의 흠이라면 흠이라 하겠다.

영화 ‘화산고(2001)’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김태균 감독은 풍성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뼈대를 세우고도 자신이 만든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독특한 색감을 배경으로 화끈한 액션을 선보이겠다는 마음이 좀 더 앞섰기 때문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결국 이 영화는 코미디와 판타지 장르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무협물을 내세우면서 액션에 보다 치중하고 있음을 넌지시 비춘다. 당시의 제작 여건을 고려한다면 무려 63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됐음은 우선적으로 화려한 시각효과와 현란한 무술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상미에 치중해 스토리에 대한 손길이 다소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현실이지만, 그러한 비판 속에서도 나름의 팬덤을 형성하며 현재에 이르러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관객들도 존재한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영화가 모든 게 완벽하기란 참 어렵다. 스크린을 압도하는데 동원되는 모든 요소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예산과 제작 여건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게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역할이다. 이 영화 <화산고>는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 누구도 달려들지 않았던 분야에 새롭고 참신한 도전을 한 영화라는 건 분명하다. 또한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한국영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보면 아쉬운 점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충분한 무협 액션과 소소한 재미를 전해주기에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얘기한 영화의 색감은 이후에도 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화면과 분위기를 이끌어내 신선한 기운이 가득하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나서도 그 기분이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좋다. 현대에 쉽게 찾아보기 힘든 신선한 시도와 노력, 그리고 독특한 색감까지, 그 속에서 이 영화의 매력을 다시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