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토글
vol.150
2020년 09월호
SPECIAL
한국재료연구원 행사사진

지난 호 웹진 보기

전체 기사 검색

KIMS SALON

그녀랑 있으면 뉴욕이 느껴져...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그녀랑 있으면 뉴욕이 느껴져...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글 - 이동기(대외협력실)

 아이가 만화책 한 권을 집어 든다. 재밌게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본 엄마의 언성이 높아진다. 왜 허구한 날 만화책만 보고 있냐고. 독후감 방학 숙제도 해야 하니 이왕이면 유익한 내용을 담은 동화책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아이가 눈이 동그라진 채 되묻는다. 만화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안 되나요? 그냥 만화도 아니고 학습만화인데. 별안간 엄마의 말문이 막힌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만화가 무슨 죄라고. 내가 어릴 적엔 만화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만화책을 더러운 것 마냥 저리 밀어두기 바빴다. 그들의 시선에서 만화는 그저 저급하고 유해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딱딱한 글자와 선이 고운 그림들로 가득 찬 동화책은 고귀하고 고결한 모습이고, 만화책은 그저 아이들이 보는 수준 낮은 책으로 취급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동화책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오히려 인상 깊게 봤던 만화책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기억 한 편에 꽂혀 있다. 네 자매의 성장이야기를 다룬 <작은 아씨들>도 영화보다 만화로 봤던 장면들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빨강머리 앤>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주인공 앤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화면은 불우한 환경 자체를 조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특별한 환경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 그녀의 삶을 보다 긍정적으로 채색하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주디 가랜드가 출연한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를 보여준 적이 있다. 어찌나 재미있어 하던지, 언젠가 그 속에서 OST <Over the Rainbow>가 가진 의미를 함께 얘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있어 내외적인 성장이야기는 만화나 영화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고 풍성하다. 이들을 통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감정과 교훈은 우리가 성장하는데 커다란 거름이 된다. 그들은 때로는 현실적이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각자의 노력을 통해 이를 극복하며 자기 자신을 가꾸어가는 과정에 익숙하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탄생시킬 줄 안다. 전형적인 성장드라마의 구조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성장 그 자체에 집중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이 가진 특별한 관계를 통해 청춘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해석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는 이처럼 독특한 배경과 재미나게 얽힌 서사 구조를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읽어내고 그 거리감을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전형적인 성장드라마와는 꽤 다르다. 외적 변인에 의한 날카로운 자극에 힘겨워하는 인물보다도 소통하는 유대관계의 중요성을 통해 자체적인 재생산 과정을 그렸다고나 할까. 주인공 트레이시(롤라 커크 분)는 영화의 시작부터 꽤 어수선하다. 바라던 뉴욕 소재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녀가 꿈꿔왔던 대학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새로운 공부를 배우는 것도, 새 친구를 사귀는 것도,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적응하는 것도 모두가 그녀가 생각한 대로 이뤄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이러한 불통을 해소시키기 위해 누군가와의 대화로 물꼬를 트고 싶어 했다. 문학동아리 ‘모비우스’에 집착한 것도 당초 문학에 관심이 있었기 보다는 그저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기 위함이었다. 그게 수포로 돌아가자, 결국 그녀는 학교 내에서의 입지보다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둘러싼 자신의 환경에 보다 집중하려 한다.

영화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곧 재혼을 하게 되는 엄마와의 통화도, 새롭게 만나게 될 새 아빠도 그녀의 고민을 현명하게 풀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새로 가족이 될 언니 브룩(그레타 거윅 분)에게 어려운 연락을 시도함으로써 뉴욕에서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기를 원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세밀한 스토리와 간결하고 빠른 대사로 이야기 전개를 속도감 있게 가져간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은 뉴욕이라는 미국 최대의 도시 속 뉴요커들의 삶을 그대로 대변한다. 뉴욕에 입성한 이들의 시작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적응’하기 위함이다. 브룩이 돈을 벌어 성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뉴욕이라는 도시에 적응하는 게 목적이다. 트레이시와 브룩은 각자가 꿈꾸는 이십대, 삼십대의 젊음을 발 딛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그들의 이십대와 삼십대의 초입에 각각 ‘적응’하고자 노력한다. 표면적으로는 ‘문학’과 ‘섹스’가, 그리고 ‘돈’이 목적인 듯 보이지만, 그들의 청춘은 결국 그런 것들보다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것들은 이의 달성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트레이시가 작성한 소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가 누군가의 모습을 묘사한 일대기인 것도, 브룩을 기분 나쁘게 만든 것도, 모두가 현재의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사과하고 글을 고치라는 권유를 받지만 그녀가 이를 거부하고 고집부리는 것도 나름의 자존심을 드러낸 게 아니라 그녀의 삶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녀가 브룩을 순수하게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대했다면 그 여정에 자신을 세워 넣고 웨이트리스로 끼워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결국 그녀는 브룩의 모습을 보게 된 첫 날 밤, 그 모습을 우습게 노래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삶과 도전에 감탄하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게 옳다. 그리고 그녀 또한 브룩의 모습에 자신을 적응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닌 가 싶다.

영화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의 한 장면 – 네이버 출처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녀는 대학에서의 생활만으로 진정한 뉴욕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브룩과 함께 있을 때, ‘아, 이 생활이 바로 뉴요커의 삶이구나.’하고 청춘의 재미를 온몸으로 느낀다. 결국 ‘뉴욕’을 느끼고 있던 게 아니라 ‘청춘’을 제대로 맛보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단지 브룩의 생활과 이상을 배우고 따라하는데 급급했던 건 아니다. 그녀가 브룩과 함께 있을 때 진정한 뉴욕 생활을 느꼈듯이, 그녀가 바랐던 진정한 이십대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파스타 종류를 앞에 두고 하나를 제대로 고르지 못해 이것저것 다 구입하는 모습 또한 그녀의 속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 때문에 소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는 브룩에 대한 단순한 비난이라기보다는 브룩을 통해 느끼는 이십대에 대한 간접적 삶의 표상을 있는 그대로 글로 표출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문학동아리를 탈퇴하고 경외하던 서류가방을 던지는 모습마저도 성숙과 발전의 단계를 거쳐 새롭게 일어서는 모습이다. 엄마와 새 아빠의 결혼 무산, 관심 있어 하는 남자친구에 대한 강한 유혹, 브룩의 레스토랑 개업 실패 등은 그들이 각자의 청춘을 걸어가는 과정에 실패가 아닌 큰 자양분으로 남는다. 트레이시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걸어가고자 먼저 손을 내미는 그 모습마저도 말이다. 영화의 마무리는 한 단계 더 성장한 그들의 모습을 비춘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겪은 실패와 아픔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응했다는 측면에서다. 어지러운 환경을 벗어나 비로소 안착했다는데 대한 안도와 기쁨, 바로 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