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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56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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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과학 이야기

파란색이 자유로워지다

파란색이 자유로워지다

파란색이 자유로워지다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정렬이 느껴지는 빨강? 포근하고 화사한 분홍? 풀 내음이 날 것 같은 초록? 세련된 검정? 아니면 깨끗한 느낌의 하양인가요?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색이 있겠지요. 참고로 저는 파란색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래서 옷이나 신발, 물건을 살 때 파란색이 있으면 그쪽으로 먼저 손이 가곤 하지요. 만약 제가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좋아하는 파란색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을 테니까요. 옛날에는 파란색이 그리 흔하지 않았거든요. 염색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란색은 애초에 자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색이 아닙니다. 빨강, 초록, 노랑 같은 색은 자연에서도 자주 보이지만, 파란색은 흔하지 않습니다. 당장 파란색 동물을 하나면 떠올리려 해 보세요.

뒤늦게 알게 된 파랑

청바지

 파란색은 인류가 최근 들어서야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색입니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에도 검은색, 빨간색, 갈색, 황토색 등이 쓰였지만, 파란색은 없습니다. 분홍색, 자주색 등으로 옷을 물들여 입었을 때도 파란색으로 물들인 옷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세계의 고대 문헌을 조사해 보면, 파란색을 뜻하는 단어도 거의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흔히 파랗다고 하는 하늘과 바다는 상황에 따라 색이 자주 변하기 때문에 의외로 파란색이라고 여기지 않았답니다.

 자연에서 파란색은 희귀한 광물이나 파란 색소가 있는 식물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천을 파란색으로 염색할 때는 식물을 이용하는데, 여기에 쓰인 식물이 인디고입니다. 흔히 인디고라고 하면 남색, 즉 청바지의 색을 나타냅니다. 파란색으로 천을 물들일 방법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인디고는 경제적인 중요성이 큰 상품이었습니다. ‘파란 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귀했던 파란색이 누구나 쓸 수 있는 색이 된 건 19세기 유럽에서 발전한 합성염료의 발전 덕분입니다. 최초의 합성염료는 영국의 윌리엄 헨리 퍼킨이 만든 ‘모브’로, 자주색이었습니다. 자주색 역시 희귀한 색으로 귀족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쓸 수 있었지요. 그 뒤 합성염료 산업이 발전하면서, 주도권은 독일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인디고 합성으로 노벨상 수상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돌프 폰 베이어는 1835년에 태어난 독일의 화학자입니다. 측지학자이자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둔 베이어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13살 때부터 염료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벤젠의 육각형 모양 구조를 발견한 유명 화학자 아우구스트 케쿨레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베이어는 1878년에 처음으로 인디고를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뒤로도 연구를 계속 이어나가 인디고의 구조를 완전히 밝혀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산 인디고보다 더 비쌌지만, 제조 방법이 발전해 자연산보다 더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되자 인디고 재배는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1897년에 1만 9000톤이었던 자연산 인디고 생산량이 1914년에는 1000톤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베이어는 이 공로로 1905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남색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베이어가 노벨상을 받은 건 인디고 합성을 통해 유기화학과 화학 산업이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에서 염료를 개발하던 화학 기업들은 첨단 연구를 이끄는 존재였고, 염료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화학 지식이 다른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의약품입니다.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바이엘은 합성염료를 만들어 파는 기업으로 시작했습니다. 합성화학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던 바이엘은 제약 연구로 눈을 돌렸지요. 이때 바이엘의 제약 연구단을 이끌었던 카를 두이스베르크는 아돌프 폰 베이어의 연구실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바이엘은 아스피린을 만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최초의 매독 치료제이자 최초의 현대적 항균치료제인 살바르산 역시 염료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정 병원체를 염색하는 염료에 독성 물질을 얹어서 만든 약이거든요.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아돌프_폰_바이어

화학공업의 발전을 이끈 인디고 합성

 단순히 파란색 옷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게 되었다고만 생각하면 노벨상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거기서 파생한 화학 기술과 의약품과 같은 제품이 인류 문명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소재를 개발하는 건 원래 목적을 넘어서 광범위하게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장 쉽게 체감할 수 있는 건 주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파란색일 겁니다. 덕분에 우리는 색에 관한 한 별 부담 없이 평등을 누리고 있지요. 그래도 청바지를 입을 때면 한 번씩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이 별거 아니어 보이는 염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요.

글. 고호관 과학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