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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59
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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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과학 이야기

[노벨상으로 보는 재료과학] 강철보다 단단한 혁신적 소재, 풀러렌

강철보다 단단한 혁신적 소재, 풀러렌

강철보다 단단한 혁신적 소재, 풀러렌

 지오데식 돔이라는 건축 구조물이 있습니다.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웬만하면 한 번씩은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삼각형 격자로 이루어진 둥근 모양의 구조물로, 경우에 따라서는 아랫부분이 잘린 반구 모양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세계 엑스포의 미국관이었던 바이오스피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이나 서울랜드에 가면 지오데식 돔을 볼 수 있습니다.

 지오데식 돔은 적은 재료로도 공간이 넓고 튼튼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방식입니다. 원래 192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1950년대에 미국의 건축가 겸 발명가 벅민스터 풀러가 ‘지오데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특허를 받으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위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한 몬트리올의 바이오스피어가 바로 풀러가 설계한 것입니다.

탄소 원자로 만든 축구공

버크민스터풀러렌(Buckminsterfullerenes) 또는 버키볼(buckyballs)의 구조
              / 출처 : NAVER 지식백과

 그런데 노벨상 이야기에 왜 건축 구조물이 나올까요? 노벨 건축상은 없는데 말이지요. 오늘 이야기할 소재인 1996년 노벨 화학상의 주인공 풀러렌 때문입니다. 탄소 원자가 구나 원기둥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자를 말합니다. 풀러렌을 발견하기 전에 과학자들이 알고 있던 탄소 동소체(탄소로 이루어졌으나 결합 구조가 달라 성질이 서로 다른 분자)는 흑연이나 다이아몬드 정도였습니다.

 1970년 일본의 화학자 오사와 에이지는 탄소원자 60개로 이루어진 공 모양의 분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실제로 발견된 건 198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1985년 영국 서섹스대학교의 해럴드 크로토 교수는 늙어가는 별인 적색거성에서 생길 수 있는 화학 반응을 연구하기 위해 진공 속에서 흑연에 강력한 레이저를 쪼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탄소 원자가 흑연에서 떨어져나와 새로운 결합을 이루며 다른 화합물을 이루었습니다. 탄소 원자 60개로 이루어진 공 모양의 분자였지요.

 이 공 모양의 분자는 구조가 육각형 20개와 오각형 12개로 이루어진 축구공과 같았습니다. 각 꼭짓점에 탄소 원자가 하나씩 있는 모습입니다. 크로토는 이 분자에 ‘벅민스터풀러렌’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풀러로 인해 유명해진 지오데식 돔과 구조가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은 벅민스터와 공을 뜻하는 ‘볼’을 결합해 ‘버키볼’이라고도 부릅니다.

* 버크민스터풀러렌(Buckminsterfullerenes) 또는 버키볼(buckyballs)의 구조 [출처 : NAVER 지식백과]

논문이 영어가 아니라 노벨상을 못 받다

해럴드 크로토 / 출처 : NAVER 지식백과

 이후 탄소 원자가 모여 구나 원기둥 모양을 이루는 여러 분자가 더 발견되었고, 벅민스터풀러렌을 줄인 풀러렌이 이런 분자를 통칭해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만들 수 있는 풀러렌의 양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연구진이 제시한 구조를 정확하기 입증하기 어려웠습니다. 연구가 더 이루어진 뒤인 1990년 정도가 되어서야 그램 단위로 풀러렌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지요.

 풀러렌의 구조는 다양합니다. 구 모양의 버키볼만 해도 탄소 원자 60개로 이루어진 것뿐만 아니라 70개, 72개, 76개, 84개 등으로 이루어진 풀러렌이 있습니다. 자연계에 풀러렌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숯 같은 곳에도 극미량이지만, 풀러렌이 들어있었습니다. 번개가 칠 때 대기 중에서도 생기기도 하고요. 2010년에는 미국의 스피처 우주망원경이 우주의 먼지구름을 관측해 풀러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습니다.

 해럴드 크로토와 함께 연구했던 미국 라이스대학교의 로버트 컬, 리처드 스몰리 세 사람은 1996년 풀러렌 발견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존재를 처음 예측한 오사와 에이지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사와는 관련 내용을 일본 학술지에 발표했는데, 당시에는 미국과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강철보다 강한 풀러렌

단일벽 탄소 나노튜브 구조 / 출처 : NAVER 화학백과

 풀러렌의 발견은 기존에는 흑연과 다이아몬드밖에 알지 못했던 탄소 동소체(탄소로 이루어졌으나 결합 구조가 달라 성질이 서로 다른 분자)의 범위를 크게 넓혀 주었습니다. 풀러렌은 다이아몬드처럼 강하면서 속이 비어 있어 그 안에 다른 물질을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성질을 이용해 약물을 체내에 전달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튜브 모양의 풀러렌인 탄소나노튜브는 지금까지 발견된 물질 중에서 강도가 가장 큰 물질입니다. 강철보다도 튼튼하지요. 고도 3만 6000킬로미터의 정지궤도까지 이어지는 우주 엘리베이터를 구상할 때 유력한 소재로 꼽힐 정도입니다. 전기적인 특성 때문에 전자 소자의 재료로 각광을 받기도 했지요. 2019년에는 미국에서 탄소나노튜브로 트랜지스터 1만 4000개가 들어가는 프로세서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풀러렌 실용화는 아직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발견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실용화가 기대만큼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알아봐야 하는 물질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쩌면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 고호관 과학칼럼리스트